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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워싱턴

by juwanalog 2025. 5. 1.
조지 워싱턴은 1732년 2월 22일 버지니아 식민지의 웨스트모얼랜드 카운티에 소재한 오늘날의 콜로니얼 비치 인근에서 어거스틴 워싱턴과 어거스틴의 두 번째 부인 메리 볼 워싱턴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다. 부친 어거스틴은 첫째 부인인 제인 버틀러와의 사이에서 네 명의 아이를 얻었는데 이들 중 둘은 어려서 죽고 둘(대략 1718년 즈음에 태어난 로렌스와 1720년 즈음에 태어난 어거스틴)은 생존하였으므로 사실상 조지는 셋째 아이였으며 이들보다 한참 어렸다. 여섯 살 되던 해에 페리 농장에서 스태포드 카운티로 이주를 하면서 조지는 아버지와 맏형으로부터 집에서 교육을 받았다. 워싱턴의 조상은 영국 출신이었다. 증조부인 존 워싱턴은 1657년에 버지니아로 이주했다. 버지니아에서 상품 작물로서 담배가 성장한 것은 이를 재배하기 위해 수입된 노예 수를 보더라도 확연히 알 수 있다. 워싱턴이 태어났을 즈음에 식민지 인구의 절반은 흑인이었다. 유년 시절에 워싱턴은 측량 기사로 활동하였는데 이를 통해 버지니아 식민지의 지형에 대한 값을 따질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맏형이 유력한 가문이었던 페어팩스 가문의 여자와 결혼함에 따라 조지는 당시 500만 에이커에 달하는 영토를 소유하고 있었던 토마스 페어팩스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1749년 늦은 7월에 포토맥 강가를 끼고 버지니아의 알렉산드리아가 세워짐에 따라 당시 17세였던 조지는 첫 번째 측량 기사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직책은 의심할 여지 없이 페어팩스 경과 그의 사촌이었던 윌리엄 페어팩스(그 땅의 소유자)의 명령 아래 보장되었다. 워싱턴은 농장주로서 활동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역사가들은 농장주의 개념을 20명 이상의 노예를 거느린 자로 규정하고 있다. 1748년, 조지 워싱턴은 블루 릿지 서쪽에 위치한 페어팩스 경의 토지를 측량하는 걸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749년 처음으로 공직에 임명되었는데 새로 생긴 컬페퍼 카운티의 측량기사로 임명되었다. 조지 워싱턴은 배다른 형제 로렌스 워싱턴을 통해 오하이오 컴퍼니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이는 서부의 땅을 개척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었다. 1751년에 조지와 로렌스는 로렌스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바베이도스의 부시 힐 하우스에 머무르면서 요양했다. 이는 조지 워싱턴이 미국을 떠난 유일한 경험이었다. 1752년에 로렌스가 죽고 난 이후에 조지는 로렌스가 소유한 부동산의 일부를 상속받았고 로렌스의 직업이던 식민지 총독의 부관 임무 중 일부를 떠맡았다. 1752년 말, 버지니아의 새 주지사였던 로버트 딘위디는 군대를 네 지역으로 개편하여 조지를 한 지역의 장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때 조지 워싱턴이 갖고 있던 유일한 자격은 죽은 형이자 부관인 로렌스의 동생이라는 점과 조지의 열정 뿐이었다. 조지는 1752년에 버지니아 군대의 부관 참모로 임명되었는데 스무 살의 나이에 워싱턴 소령으로 임명된 것이었다.